▲ 군산 한길문고, 어른들을 위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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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생을 앨리스에서 살았어. 내가 아는 유일한 곳이지. 좋은 동네고, 이곳을 쭉 그렇게 살리고 싶어. 서점이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도 없잖아."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그는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의 주인공이 아니다. 아내를 잃고 죽도록 술만 마셨던 에이제이가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이자 '아일랜드 서점'의 주인이다. 에이제이는 서점에 버려두고 간 누군가의 아기 마야를 입양했다. 그게 신경 쓰였던 경찰관 램비에이스는 서점에 들락거리다가 책 읽는 재미를 알았다.
서점에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아일랜드 서점에는 생기가 돌았다. 책을 좋아하며 자란 딸 마야는 고등학생이 되어 글을 쓰고, 서점 주인인 아빠는 뇌종양에 걸렸다. 온라인 쇼핑도 하고, 전자책도 읽었던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서점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났어도 서점만은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한 시대의 종말이군."
램비에이스는 아일랜드 서점이 문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저축도 넉넉하고, 연금도 보장된 삶을 눈앞에 둔 그는 정신 나간 것 같은 결정을 했다. 동네서점의 새 주인이 됐다. 이 세상에 없는 서점이지만, 있다면 꼭 가보고 싶은 서점 이야기였다.
▲ 종이책을 안 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시대. 서점을 아끼는 사람들 덕분에 한길문고는 32년째 버티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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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종이책을 안 읽어도 아쉬울 게 없는 시대다. 책 말고도 재밌는 게 너무너무 많은 시대, 온라인 서점과 대형 쇼핑몰 안에 들어선 프랜차이즈 서점이 동네서점을 재빠르게 제압한 시대. 서점이 없는 동네도 많다. 그러나 군산에는 32년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서점 한길문고가 있다.
데모 나갈 때 책가방을 맡아준 서점, 한없이 (만화)책을 읽고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던 서점, 용돈을 모아서 처음으로 사고 싶었던 책을 산 서점, 마술사가 되고 싶어서 마술책을 읽었던 서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임신과 출산 잡지를 샀던 서점, 아무 때든 좋다고 모임 공간을 내준 한길문고 덕분에 사람들은 서점에 대한 추억 한두 개쯤은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 25일. 한길문고는 초등학생들에게 근사한 선물을 했다. 1시간 동안 책을 읽으면 시급을 주는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긴장감이 흐르던 대회는 30분 넘어가자 분위기가 흔들렸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이들은 자꾸 내 눈을 보며 물었다. "몇 분 남았어요?" 하지만 그 억겁의 시간을 이겨내고 책 읽기에 모두 성공했다.
참가한 어린이들도, 따라온 부모들도 '크리스마스 무용담'을 몇 날 며칠간 이야기했다. 그토록 흐뭇한 장면을 페이스북에서 목격한 몇몇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진중한 자세로 한길문고 대표와 상주작가한테 제안했다.
"어른들이 참여하는 대회도 열어주세요. 먹고사는 일에 정신 없어서 1시간 동안 책 읽는 게 진짜 힘들거든요."
▲ 환상의 서점. 1시간 동안 책을 읽으면 시급을 준다. 물론 어른이니까 맥주와 해물파전까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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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끝나면 시급(8350원)에 맥주, 해물파전까지 주는 걸로 결정했다. 혹시 아이들처럼 어른들도 1시간 동안 꼼짝 않고 책 읽는 게 힘들 수 있나? "3월에 생일이거나 첫 데이트를 했던 사람들은 5분간 엉덩이를 떼어도 돼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책 읽기 대회를 한다는 포스터는 동네방네 붙이지 않았다. 어느 밤, 한길문고 페이스북에 조용히 올렸을 뿐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서점 전화는 계속 통화 중. 책 읽기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사람들이 빗발치듯 전화를 걸어왔다. 선착순 30명을 40명으로 늘렸어도 접수는 금방 끝났다.
3월 15일 금요일 밤. '어른들을 위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부터 말했다. 인터넷 서점이나 대형마트에 딸린 서점에 안 가고 한길문고에 와주는 마음을 알고 있다고. 딱 거기까지였다. 마이크를 잡은 내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 심사는 엄격할 거라고 했다. 어린이들 대회처럼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엉덩이를 5초 이상 떼면 안 됩니다. 바로 탈락이에요. 스마트폰 보는 것도 안 되고요. 대회 끝나기 10분 전부터는 해물파전을 부칠 거예요. (웃음) 맛있는 냄새를 계속 맡고 있어도 탈락입니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꼭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 군산 한길문고. 어른들을 위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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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으로 맞춘 스마트폰 타이머를 눌렀다. 서른일곱 명의 어른들은 갯벌의 게처럼 각자의 책으로 쏙 들어갔다. 내가 일부러 노트북 자판을 초스피드로 두드려도 쳐다보지 않았다. 김우섭 점장님이 사진을 찍으러 대회장으로 들어와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완벽해 보여도 틈이 있긴 있다. 나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눈이 땡그란 선생님이 젤리를 입에 넣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는 암시를 하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나까지 공범으로 만드는 전략을 썼다. 아무 말 없이 멜론 젤리를 내밀었다. 몰래 먹는 건 무엇이든 기막히게 맛있는 법. 눈감아 주고 말았다.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 끝나기 10분 전, 군산시 나운2동에서 가장 전을 잘 부치는 남자 두 명을 투입했다. 두 사람은 전기 프라이팬을 달구고는 기름을 둘렀다. 반죽을 한 국자씩 떠서 팬 위에 올렸다. 치지직 소리가 나면서 해물파전 냄새가 퍼졌다. 최선을 다해서 참고 있다가 터진 웃음, 큭큭큭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의 범인은 아예 흐느끼듯 웃었다.